목차 Ⅰ. 머릿말 Ⅱ. 조공관계로 형성된 류큐왕국의 황금기와 멸망 1. 고(古) 류큐시대 -명나라와의 조공관계를 중심으로 2. 근세(近世) 류큐시대 -'양속(兩屬)관계'를 중심으로 3. 메이지 明治 일본과 류큐왕국의 멸망 -일본 정부의 예속을 중심으로 Ⅲ. 맺음말 본문 Ⅰ. 머릿말 류큐(琉球)는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을 무대로 19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던 해상왕국이다. 제주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인 것처럼, 오키나와가 일본영토의 일부라는 것에는 일말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05년 류큐대학 조사팀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1029명의 류큐인 중 40.6%는 '나는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답했으며, 24.9%가 '오키나와의 류큐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류큐왕조의 역사와 일본으로써의 오키나와 역사를 비교하며 따로 가르치기도 한다. 본 발제에서는 류큐 역사의 대외관계 핵심을 이루는 대중국관계와 대일본관계를 통해 류큐의 멸망과정을 조망하면서 위의 의문에 대한 이유를 고찰할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 연결고리로 작용한 조공관계 측면으로 이를 풀어나가면서 류큐왕국의 동아시아적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Ⅱ. 조공관계로 형성된 류큐왕국의 황금기와 멸망 1. 고(古) 류큐시대 류큐와 중국의 조공관계는 명나라 1372년 태조 5년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류큐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송, 원시대 도자기를 무역한 흔적이 발견되어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것을 알 수 있으나 명대에 이르러 양국은 조공국과 종주국 관계에 접어듦에 따라 류큐가 공식적으로 '역사시대'의 기록으로 전하게 된다. 당시 조공관계를 맺은 것은 삼산(三山: 中山, 山南, 山北)으로 분열된 백중지세 가운데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다. 따라서 조공관계를 맺은 실질적 목적은 대국으로부터 정치 경제적 후원을 받아 삼산의 분열 상황을 속히 타파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공관계는 세력 간 비례로 이어져 류큐가 통일왕조를 이룩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1429년 류큐왕조의 통일 이후에도 중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긴밀했다. 유학생 파견 등의 활발한 인적 교류, 중국으로부터 다방면의 지원, 조공관계의 특수성 등이다. 그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이 '특수한 성격'이다. 중국에서 류큐로 사신을 보내는 것은 지리적으로 번거롭고 위험 또한 컸지만 '무신'이 아닌 문예에 능한 '문신'을 매번 파견했다. 명 입장에서는 류큐가 일본 바로 옆에 위치하기 때문에 왜와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류큐에서는 문신은 길례(吉禮)의 경우, 무신은 군사(軍事)의 경우에 파견되는 전통을 이용해 왜구에게 류큐왕국의 세력을 과시할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외적 안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명나라의 정책은 왜구와의 내통을 금지하는 '해금(海禁)정책'을 반포해 류큐가 해상왕국이라는 황금시대를 누리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키워드 류큐왕국, 왕국, 오키나와현, 멸망, 류큐 |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류큐왕국의 멸망 -왕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
류큐왕국의 멸망 -왕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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